축구 인물

"나는 축구를 위해 태어났다" 축구 황제 펠레(Pelé) [soccer history]

soccer-history 2024. 9. 21. 01:44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펠레

 

 

 

머리는 가슴에게 이야기하고,

가슴은 발에게 이야기한다.

 

-  Pelé                                                

 

 

 

 

 

유년기

브라질 남동부의 미나스제라이스주에서 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발명왕 에디슨의 이름 따서 에드송(Edson)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출생 증명서에는 에지송(Edison)으로

오기되어 그 이름이 정식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주앙 하무스 두 나시멘투로 별명인 "돈지뉴"로 잘 알려져 있던 축구 선수이다.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해 방출당하여 군소 클럽에서 낮은 급여를 받고 뛰는 등 성공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1944년에 펠레는 아버지가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은퇴하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 상파울루주 바우루로 이주했으며

아버지가 바우루 시청 축구팀인 바우루 AC의 선수로 취직하기 전에는 구두닦이 일을 하면서 생계를 도왔다.

 

 

머니인 도나 셀레스치는 매우 엄격한 여성이었으며, 아들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운동 선수 대신에 안정된 직장을 갖길 원했으며, 이에 따라 엄격히 교육을 시켰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비행기 조종사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축구 선수가 되려하였고, 어머니의 눈을 피해

아버지에게 축구 기술과 마음가짐을 배웠다.

 

 

 

애칭

"펠레"라는 애칭은 상로렌수의 지역 연고팀인 바스쿠 다 가마의 주전 골키퍼 빌레(Bilé)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라는 의견들도 있지만 그의 자서전에서는 펠레 자신도 "펠레"라는 애칭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모른다고 밝혔다.

 

 

 

클럽경력

산투스 FC (1956~1974)

 

16세에 산투스의 1군이 된 펠레 (나무위키)

 

 

1956년에 산투스 FC에 입단한 펠레는 당시 60kg도 안되는 작은 체구였다. 그는 바로 1군에서 뛰지 못했고, 2군과 유소년팀에서 훈련을 계속하였다.

 

9월 7일에 7-1로 승리한 SC 코린치앙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산투스 선수로서의 첫 경기를 가졌고 첫 득점을 기록했다.

 

이후 산투스의 주전 공격수이자 펠레와 친했던 동료 선수인 바우테르 바스콘셀루스가 골절 부상을 입으며 시즌 아웃을

한 것을 계기로 브라질 프로 리그 출전 기회를 얻었다.

 

바스콘셀루스는 부상에서 회복한 후에도 이전과 같은 경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자바쿠아라 아틀레치쿠로 이적했다.

 

바스콘셀루스 이적 후 펠레는 1957년에 상파울루주의 축구 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에서 득점왕에 오르는 활약을 보였고, 4월 8일에 산투스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산투스를 떠난 후인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북미 사커 리그(NASL)의 소속 클럽인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하였다.

 

1970년대에 당시 축구의 불모지였던 미국은 축구를 빠르게 보급하여 FIFA 월드컵을 유치하고자 하였으며, 펠레가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할 때 미국에서 뛰는 것으로 축구 발전에 협력해달라는 취지의 공문을 발행하여 이적을 지원했다.

 

펠레의 미국 진출은 조르조 키날리아가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한 것을 시작으로 프란츠 베켄바워, 산투스 시절 동료인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요한 크라위프, 에우제비우, 보비 무어, 조지 베스트, 고든 뱅크스 등의 축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선수들이 미국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펠레는 축구 불모지였던 미국에 축구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는 인기 선수로 활약하여 뉴욕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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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턴에서 열린 공개 석상에서는 그를 보려고 몰려든 인파에 몰려 부상을 입고 들것에 실려나가기도 했다.

 

 

국가대표

 

나무위키

 

 

1957년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에서 열린 산투스의 친선 경기를 관람하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시우비우 피리유에 의해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같은 해 7월 7일에 마라카낭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코파 로카 1차전을 통해 A매치에 처음 출전하였다.

 

그는 57분에 데우 베시우와 교체 출전했으며 브라질 축구 대표팀 사상 최연소 출전 기록을 남겼다. 경기는 1-2로 패했지만 펠레는 브라질 대표팀의 유일한 골을 넣었다.

2차전에서도 상파울루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조제 아우타피니와 함께 골을 넣으며 2-0으로 승리하여 코파 로카 우승을

달성했다. 그 후에도 산투스와 브라질 대표팀을 오가며 크게 활약했다.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년 연속 득점왕이라는 실력의 증거로 1958년에 다시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은 펠레는

5월 4일 파라과이와의 타사 오즈와우두 크루스 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1차전에서 지다

교체되어 경기에 나섰고 팀의 네번째 골을 넣으며 A매치 3연속 득점에 성공했다.

 

이후 이 경기를 본 브라질 대표팀 감독인 비센치 페올라에 의해 1958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에 소집되었고

등 번호는 10번을 받았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에 동석했던 심리학자가 펠레와 가린샤가 대표팀에 선발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는 데

반면 페올라는 몸이 빠르고 찬스에 강한 둘을 기용하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하여 두 사람을 대표팀에 포함시켰다.

 

 

1958 월드

첫 번쨰 월드컵 우승

위키백과

 

5월 18일에 불가리아와의 평가전에서 2골을 넣었으나 무릎 부상을 입고 조별 리그 경기 2경기를 결장했다.

이후 3차전인 소련과의 경기에서 월드컵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8강전인 웨일스와의 경기에서도 선발 출전하여 66분에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골을 넣어 월드컵 사상 최연소 득점(17세 239일)을 성공하였다.

 

준결승전인 프랑스와의 경기에서는 52분, 64분, 75분에 연달아 골을 넣으며 해트트릭을 기록하였다.

 

결승전인 개최국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55분에 발리슛으로 골을 넣고 종료 직전에 마리우 자갈루의 패스로 헤딩슛을 성공시키며 브라질의 첫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55분에 기록한 스웨덴의 벵트 구스타브손의 머리에 맞은 공을 띄워 발리슛으로 연결시킨 것은 펠레의 골 중 최고의 골로 평가받는다.

 

1962년 월드컵

두 번쩨 월드컵 우승

 

 

 

 

1960년 타사 두 아틀란치쿠 이후 펠레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1961년에는 모든 A매치에

불참했다. 이후 대표팀 감독인 아이모레 모레이라에 의해 1962년에 다시 국가대표로 복귀하였다.

 

1962년 4월 파라과이 대표팀과의 타사 오즈와우두 크루스를 통해 A매치에서 복귀한 펠레는 4월 21일에 열린 1차전에서

1골, 4월 24일에 열린 2차전에서 2골을 넣으며 다시 한 번 브라질의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칠레에서 열릴 196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포르투갈 웨일스와 가진 2차례씩의 평가전에서 종합 4골을 넣으며 브라질의 4연속 승리에

기여했다.

 

1962년 월드컵 대회에서는 조별 리그 첫 경기인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1골과 1도움을 기록하였으나 2차전인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 당시에 전반 25분에 드리블로 돌파하여 중거리 슛을 날렸으나 이 슛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골키퍼 빌리암 슈로이프에게 막혔다.

이 뿐만 아니라 중거리 슛을 날릴 때 허벅지 근육 부상을 입었으며 근처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수비수인 스바토플루크

플루스칼이 펠레가 부상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기도 했다.

 

이후 펠레는 남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나 브라질 대표팀은 펠레 없이 대회 2연속 우승 달성에 성공했으며 펠레의

공백은 아마리우두가 채웠다. 아마리우두는 결승에서 1골을 넣으며 우승에 기여했다.

 

1970년 월드컵

세 번쩨 월드컵 우승

월드컵 당시의 펠레 위키백과

 

 

펠레는 1966년 월드컵 이후 2년 간의 대표팀 공백을 가졌다. 그 동안 FIFA에서 월드컵에서의 선수 교체 제도와

카드 제도를 정비하는 등 선수 보호에 힘을 쓰자 다시 한 번 정점에 사보고 싶다는 의식으로 인해 1968년에 대표팀 복귀를 선언했다.

 

1970년 1958년 월드컵에 함께 뛰었던 마리우 자갈루가 브라질 대표팀의 감독이 되었고 펠레는 호베르투 히벨리누, 

제르송, 토스탕, 자이르지뉴 등의 공격진과 함께 멕시코에서 열린 1970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하였다

 

1차 리그 첫 경기인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는 4-1 대승을 기록했는데 펠레는 이 경기에서 1골과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차전에서는 전 대회 우승국인 잉글랜드 1-0으로 물리치며 결선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했다.

 

펠레는 승리를 확정한 골에도 기여했는데 당시 토스탕이 잉글랜드의 주장 보비 무어의 압박을 뚫고 펠레에게 패스에

성공했다.

잉글랜드의 브라이언 러본 테리 쿠퍼는 펠레가 슛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펠레는 그들의 예상과 달리

자이르지뉴에게 패스했고 자이르지뉴가 골을 넣으며 브라질의 승리를 확정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무어와 유니폼을 교환을 하며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보비 찰턴은 이 경기를 일컬어 "축구의 교과서적인 경기로 축구의 모든 것이 이 한 경기 안에 들어있다." 라고 평가했다.

 

 

루마니아와의 3차전에서는 19분 만에 프리킥으로 득점에 성공했으며, 22분에 자이르지뉴가 득점에 성공하면서 2-0으로 경기를 이끌었다.

이후 67분에 토스탕의 패스를 받고 슛을 날리며 멀티골에 성공하면서 승기를 굳혔다

 

결승전 상대는 무실점으로 결승에 올라온 이탈리아였으며

18분에 이탈리아 수비수인 타르치시오 부르니치의 손까지 동원한 방어를 돌파하여 헤딩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이후 자이르지뉴와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활약을 보이며 월드컵 3번째 우승에 기여했다.

 

 

 

은퇴

 

1971년 7월 11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오스트리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자신의 국가대표 마지막 골을 기록했으며

경기는 1-1로 비겼다.

같은 해 7월 18일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와의 2-2로 무승부로 끝난 친선 경기를 끝으로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펠레는 브라질 대표 선수로서 A매치 91경기에 출전했고 클럽과 리그 선발팀과의 경기 등 비공식 경기를 포함하면

총 113경기에 출전하였다.

또한 총 77골을 기록하며 브라질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로 기록되었으며, 비공식 경기를 포함하면 브라질 대표로서

총 95골을 기록했다.

 

다만 2001년 1월 FIFA에서 1968년 11월 6일에 리우에서 열린 브라질 대표팀과 FIFA 올스타팀과의 친선 경기를 A매치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으나 브라질 축구 연맹은 이 경기를 공식 기록에 포함하여 펠레의 A매치 출전 수를 92경기로 간주하고 있다.

 

 

 

 

 

 

 

Edson Arantes do Nascimento( 1940.10.23 ~ 2022.12.29)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라.

영원히."

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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